top of page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어느 때보다도 랭험의 하루하루는 분주했다. 아담은 심혈을 기울인 시즌 메뉴를 속속 선보였고 케이틀린은 홀 전체와 출입문 앞 쪽에 둘 크리스마스 장식에 여념이 없었다.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 특별한 와인이며 케잌을 선정하는 건 토니의 몫이었다. 그날 랭험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선사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준비는 완벽해 보였다. 12월 초순을 막 넘긴... 그러니까 크리스마스가 2주 쯤 남은 어느 날 아침. 토니가 그 꼴로 나타나기 전까진.

  "토니!!!!"

  케이틀린의 비명에 주방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일이예요? 세상에."

  케이틀린이 토니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앞으로 다가서다 난데없이 뒤로 확 제껴졌다.

  "뭐야? 얼굴이 왜 이래?"

  토니의 턱을 잡아 올린 아담이 엉망이 된 얼굴을 보며 물었고 토니는 아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며 낮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열쇠를 두고 가서..."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토니의 팔을 잡아 끈 아담이 사무실로 들어가 팽개치듯 토니를 앉히고 그 맞은편에 의자를 바짝 당겨와 앉았다.

  "무슨 일이야? 집 안에 무슨 일 있어?"

  "귀신같네."

  "집안사람 아니면 누가 감히 토니 발레디한테 손을 대?"

  케이틀린이 빼꼼 문을 열고 말을 중단시켰다.

  "저기... 마실 거라도..."

  아담이 짜증 섞인 얼굴로 눈썹을 구기며 케이틀린의 말을 잘랐다.

  "됐어."

  셰프의 성난 목소리에 잘못한 것도 없는 케이틀린이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가자 아담은 복도를 향한 창마다 블라인드를 내려 가렸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별거 아냐."

  토니가 머뭇거리며 마주 잡은 손을 불안하게 비비다 겨우 입을 다시 열었다.

  "결혼을 하려고."

  다시 의자에 앉으려던 아담이 그대로 굳어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토니의 얼굴을 봤다.

  "뭐?"

  지금껏 토니 입에서 나온 말 중 이렇게 현실감 없는 말이 있었던가. 장 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 정도로 비현실적이진 않았다. 한동안 넋 나간 얼굴로 토니를 보던 아담이 한참만에야 정신을 가다듬고 의자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쳤다.

  "언제?..."

  '언제?'보다는 '누구와?'라고 물어야 정상이지만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토니 발레디가 결혼이라니?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도 못하는 이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그 사람... 피앙세 비자가 만료되는 시점이라... "

  "잠깐만. 그런 것까지 말 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요점은 네가 집안에서 허락할 수 없는 결혼을 결정했다는 거지?"

  "어. 가족들 참석 하에 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서."

  "그래서?"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아."

  "..."

  "그래서 말인데..."

  아담은 그냥 나가버리고 싶었다. 토니 입에서 나올 다음 얘기가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랭험에서 하려고... 증인으로 랭험 식구들이 와줬으면..."

  제기랄. 불길한 예감 그대로였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 랭험에서 토니 발레디의 결혼이라니. 주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아담은 자꾸 발밑의 바닥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에 현기증이 났고 이어진 런치 타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얼이 빠져 버렸다.

  홀이고 주방이고 모두 궁금증으로 눈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가 브레이크 타임이 시작되자마자 온통 그 얘기뿐이었다.

  "지배인님 사귀는 사람 있었어? 그런 낌새 전혀 없었잖아?"

  "완전 뒤통수 맞은 느낌이야."

  "도대체 어떤 여자 길래?"

  런치타임 동안 들어 온 고객들의 피드백을 살펴보던 아담의 손이 순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자기 본위적인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랬다. 토니의 결혼상대로 금발에 깨끗한 푸른 눈 따위를 가진 여성의 이미지를 그렸던 자신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는지. 토니 발레디가 결혼을 한다면 그 상대는 여자가 아닐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가능성이 더 컸다. 가뜩이나 복잡한 심경이 더 뒤죽박죽이 돼 버렸다. 토니 발레디의 배우자로 만나야 할 남자라니. 게다가 피앙세 비자라면 결혼 이민을 하려는 외국인이 아닌가? 도대체 평범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망할 결혼.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니.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 토니는 덤덤했다. 조심스레 피로연의 메뉴를 상의해 오고 케이틀린에게 장식할 꽃에 대해 지시를 하는 동안에도 토니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고 특별히 들떠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주어진 과제를 완수하듯 담담하게 메뉴얼대로 움직였다. 정작 들뜨고 기대에 찬 건 헬렌이나 케이틀린 같이 멀지않은 미래에 결혼을 꿈꾸는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결혼만큼이나 토니의 결혼식준비에 정성을 들였고 즐거움에 내내 깔깔거렸다. 그리고 여기 토니만큼이나 무감각하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아담이 있었다. 토니의 모습이 불편했다. 차라리 그가 웃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 결혼을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불편한 마음은 내내 이 결혼에 대해 뭔가 얘기를 듣고 싶어 했지만 자신이 알고 싶은 게 무엇인지조차 불분명한 탓에 아담은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걸 멍하니 지켜 볼 뿐이었다.

  "메인은 비프가 좋겠어. 무난하니까. 다른 손님은 없어. 그 날 참석할 랭험 식구들 몫만 준비하면 돼."

  결혼식에 올릴 샴페인을 고르면서 토니의 목소리는 마치 오늘 디너타임 메뉴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이나 사무적이었다. 기어이 참지 못하고 아담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대체 왜 하려는 거야? 영주권 때문이야?"

  아담의 목소리가 너무 격앙돼 있었기에 토니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맞아."

  "도대체 뭐하는 작자 길래."

  "고마운 사람이야."

  토니의 입에서 나온 믿을 수 없는 말에 아담이 기어이 폭발해 버렸다.

  "고마운 사람? 그래서? 지금 감사하는 맘으로 결혼을 해주겠다는 거야?"

  "내 도움이 필요해."

  "쳐 맞을 만도 하네."

  아담이 기가 막혀 토니를 한번 노려보고 거칠게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나가 버렸다.

뒷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물면서도 방금 자신이 들은 얘기가 믿기지 않아 아담은 계속 헛웃음이 터졌다. 미친 거야. 토니 발레디는. 고마워서 결혼 한다면 자신은 진즉에 앤 마리랑 결혼했어야 했고 시몬이랑 결혼했어야 했고... 그리고 마땅히 토니 발레디와 결혼하는 건 자신이어야 했다. 어떻게 그런 이유로 결혼할 생각을 하는지 아담은 어이가 없어 홀 쪽을 몇 번이고 다시 노려봤다. 할 수만 있다면 토니의 머리를 쪼개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답답한 심정을 털어 놓을 상대가 없자 아담은 기어이 로스힐드 면전에서 그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토니의 결정인데 제가 뭐라고 말을 하겠어요?"

  "주치의잖아요. 적어도 인생이 엉망이 되는 건 막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훗. 로스힐드가 짧게 웃었다.

  "설마 토니가 자신의 인생을 망치려 이 결혼을 하려 든다고 생각해요? 무엇 때문에?"

  로스힐드와의 대화가 껄끄러운 건 매번 이렇게 거침없이 본질만 짚어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로스힐드의 은은한 미소는 '토니의 인생은 당신 없이도 잘 버텨 왔어요.' 혹은 '이 결정은 당신과는 관계없어요.' 라고 말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건 면죄부가 못 되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토니는 분명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을 테고 가족들에게 얻어터져 가면서까지 저런 해괴한 결혼을 하려들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사랑하는 사람과 보통의 평범한 결혼을 했을 테다. 애초에 토니에게서 그럴 기회를 박탈한 건 자신이다. 로스힐드의 진료실을 나와 랭험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런던의 음습함 만큼이나 무거운 죄책감이 등 뒤에 따라 붙었다.

  끝없는 상념은 꿈속에까지 이어졌고 이튿날은 새벽 다섯 시도 되기 전에 깨어 앉아 나지막이 "토니..."라고 읊조리게 만드는 것이다. 내부에서 무언가 붕괴되는 느낌이었다. 정체를 모를 불쾌감과 조바심. 그것들은 무딘 쇠칼처럼 묵직한 통증을 유발하며 심장을 쑤셔댔고 어쩐지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이미 불행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안겼다. 그렇게 아담 존스는 토니 발레디의 존재가 자신의 인생에서 이렇게나 중요한 이슈였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내상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토니의 결혼식이 이틀 남은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제멋대로 자란 어깨길이의 금발을 대충 묶은 장신의 남성이 토니를 따라 랭험으로 들어 올 때, 아담은 자신이 회복 불가능한 치명상을 입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불분명한 욕망은 그것을 비춰주는 거울을 마주할 때야 비로소 수치스런 민낯을 드러내는 법이다. 랭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랭험 그 자체인 토니 발레디 옆에서 웃고 있는 걸 본 아담이 느낀 건 모욕감이었다. 토니는 트야치에게 납치된 이둔 같았고 남자는 마치 점령군처럼 순결한 랭험을 욕보이고 있었다.

  주문지에는 결혼 피로연의 메뉴로 택한 음식이 적혀 있었다. 뚫어질 듯 종이를 노려보던 아담의 숨이 점점 가빠지고 입술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런 아담의 상태를 예민하게 알아챈 헬렌이 그 손에서 주문지를 빼앗아 데이빗에게 넘겼다. 그리고 디너타임 동안 점점 컨트롤 불가능한 상태가 된 아담을 주방에서 내쫒았다. 재킷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터덜터덜 뒷문으로 걸어 나간 아담은 다음날 랭험에 출근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셰프가 빠진 주방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하루 종일 고함과 비명소리가 오갔고 영업이 종료되었을 땐 다들 탈진 직전이었다. 하지만 내일로 닥친 토니의 결혼식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남았기에 사라진 셰프를 걱정할 틈도 없었다.

  토니는 마지막으로 홀을 둘러보았다. 랭험의 테이블마다 소박하지만 화사한 미스티블루와 에린지움으로 장식한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랭험의 상징인 에린지움에 다른 꽃을 섞은 건 처음이었다. 그 광경은 가슴 한 켠이 아리면서도 뜻밖의 기대를 품고 있는 추상화의 이미지처럼 보였다. 자신에게 그런 기대가 남아 있는 걸까... 토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임스와의 결혼은 일종의 의무 같은 거였다. 물론 고마운 사람이고 호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취업이민의 자격만 갖췄어도 결혼 대신 랭험에 고용하고 끝냈을 것이다. 아니. 이것도 거짓이다. 사실은 조금 지쳤다. 자의로는 아담을 포기할 방법이 없었기에 불가능은 불가능의 영역으로 보내줘야 했다. 비겁하지만 제임스의 욕망에 기대 자신의 감정도 어딘가에 유배시키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진심으로 그 곳에서 쉴 수 있기를 바랐다.

  한참만에야 홀의 불을 끄고 출입문을 잠그고 클로즈팻말을 걸고 돌아선 토니 앞을 검은 그림자가 막아섰다.

  "얘기 좀 해."

  아담은 그제 사라졌던 모습 그대로 셔츠 바람이었고 머리며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리고 눈가가 붉었다.

  "술 마셨어?"

  "어."

  "미쳤구나."

  아담이 다짜고짜 토니의 팔을 잡았고 갈 곳도 모르면서 그를 당겼다.

  "어디로 갈래? 음... 너 네 집으로 갈까? 아니면... 내 방으로 갈래?"

  "나중에 해. 취했잖아."

  "지금!!! 할 말이 있다고."

  "술 마신 사람이랑은 할 말 없어."

  "오! 제발... 토니. 마이 리틀 토니..."

  아담은 막무가내로 토니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애원했다. 갑작스레 덮쳐온 아담의 무게에 휘청했지만 토니는 그를 밀어내지 않고 버텼다. 술기운에 열이 오른 아담의 몸에서 풍겨오는 강한 체취에 숨이 막혔다. 되도록이면 맡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지만 어쩐지 꾹 다문 입 가장자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아담처럼 눈가가 빨개진 토니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프론트의 직원을 호출했다.

  "수고했어요."

  객실까지 함께 옮겨 준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저 거구를 옮기느라 엉망이 된 넥타이를 정리하고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침대 위에 널부러진 그를 내려다 봤다. 아담 존스. 참 모질고도 힘겨운 이름. 이런 행동이 얼마나 큰 상흔으로 남는지 알지도 못하는 무신경함에 또 처음인 것처럼 질리면서도 여전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이 가련했다.

  "얼마나 힘에 부치는지 모르니까... 너는 이럴 수 있는 거지?"

  아담의 '아침 해줄까'나 '눈부신 키스'에 자신이 원하는 그런 희망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억누를 수 없는 마음이 솟구치는 일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아담은 결코 알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흔들리게 하면 안 돼. 어디에도 없어. 그대로 아담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버리고픈 마음을 야무지게 휘어잡으며 일어서려 할 때였다.

  "넌... 한 번도 물어 본 적 없어."

  아담의 깊고 푸른 눈동자가 어느새 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보느라 토니는 아담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달지 못했다.

  "알아? 넌... 한번도.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아보려 한 적 없어."

  "너한테 마음이란 게 있긴 해? 설령 있대도 알고 싶지 않아."

  "어련하시겠어? 콧대 높은 도련님."

  아담이 몸을 일으키려 했고 토니가 그의 등을 받쳐 줬다. 그러자 토니가 몸을 바로 세우기도 전에 아담이 그의 양 팔뚝을 붙들었다.

  "너는 구걸해 본 적도 매달려 본 적도 없지?"

  "..."

  "하지만 난 달라. 난 안 해본 게 없으니까."

  아담의 크고 강한 손이 불시에 토니의 팔뚝을 잡아당겨 얼굴을 붙들고 그대로 자신의 입으로 끌고 갔다. 구역질 날만큼 시큼한 냄새에 절여진 아담의 혀가 입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목젖까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정말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아담의 얼굴은 점점 더 우직하게 밀고 들어와 기어이 토니의 고개를 뒤로 꺾었다. 그리고 두 팔은 토니의 얇은 어깨를 완전히 감싸 눌렀다. 토니도 포기하지 않았다. 숨이 넘어갈 듯 버둥대면서도 아담을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담의 혀는 더 깊이 토니의 안을 파고 들어왔고 아담의 품은 토니의 몸을 완전히 집어 삼켰다. 마침내 토니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대신 내려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담이 허리를 받치고 당겨 안아 토니를 침대에 눕혔다. 여전히 토니의 입술은 붙들린 채였고 숨이 모자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지만 아담의 집요한 키스는 멈출 줄 몰랐다. 토니는 도무지 아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 이 행위가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어 아담의 손이 재킷 하단을 엉망으로 구기며 밀어 올리고 셔츠 안으로 파고 들 때도 머릿속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서야 아담의 입이 떨어졌고 토니는 거친 숨을 몰아 헉헉 쉬며 물었다. 아담은 바로 아래 보이는 토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속눈썹과 그 아래 빛을 잃은 정다운 갈색 눈동자. 오랜 키스로 젖은 채 부어오른 붉은 입술까지. 차가운 표정 어디에도 욕망은 없었다. 짧은 키스에도 설렌 호흡을 급하게 삼키던 그의 리틀 토니는 없었다. 순결한 반응 없음에 굴욕감이 목구멍을 넘어 쏟아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도 아담은 토니를 붙든 손을 놓진 않았다.

  "나한테... 기회를 줘. 제발..."

  무엇이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얼마 전까지 아담은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늘 호감을 느끼는 단계에서 섹스를 해버리고 뒤따라오는 감정들이 귀찮아서 도망쳐 버렸다. 헬렌이 조금 예외이긴 했다. 분명 그녀에겐 이전 여자들과 다른 어떤 애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서 눈을 뜬 아침. 헬렌과 릴리가 주방에서 함께 달걀을 굽고 빵을 써는 것을 보면서 그는 완전히 좌절해 버렸다. 헬렌과의 관계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다른 무엇을 발견해 버린 것이다. 헬렌은 멋진 남자 외에도 릴리의 좋은 아빠가 필요한 여자였다. 전 남편과 헤어진 이유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물론 헬렌은 사랑스럽고 릴리는 귀여웠다. 하지만 그 두 사람과 가정을 이룬 삶은 도저히 자신으로선 그려 볼 수 없는 그림이었다. 그 길로 헬렌과 끝냈다. 그리고 친구이자 동료. 혹은 동지로 지내는 지금이 훨씬 둘에게 어울리는 관계라고 결론지었다.

  문제는 토니였다. 토니와의 관계는 완벽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건 둘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믿었다. 둘은 서로에게 완벽한 파트너였고 서로의 과거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감히 감정 따위가 끼어들어 깨트릴 수는 없는 완전함. 그 완전함이 토니의 일방적인 인내를 희생양 삼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토니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로 이 관계를 지켜왔지만 아담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토니의 일정 부분을 점유한다는 상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고 기어이 이런 추한 몰골로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 당혹스러움이 누군가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확인해 보고 싶어."

  18살에 아담을 만나 꼭 그만큼의 시간동안 그를 사랑했던 토니에겐 가장 잔인한 순간이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단념을 겨우 시작하는 단계에서 또 다시 붙들렸다.

  "왜 이제 와서..."

  "잃어버릴까봐."

  "그게 사랑이야?"

  "그게 사랑일지도 몰라서."

  "착각하지 마. 심술일 뿐이야... 네 욕심일 뿐이야."

  하지만 부정하는 입과 달리 그의 눈은 아담을 향해 있었다.

  "뭐래도 좋아. 널... 가지고 싶어."

  마지막 말에 결국 무너졌다. 단 한 번의 파도가 오랜 시간 공들여 다진 모래성을 순식간에 허물어 삼키듯 토니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토니에게 아담은 그랬다.

  "넌... 정말이지..."

  "그래. 개새끼야."

  아담이 토니의 얼굴로 벅찬 미소를 쏟아 부으며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가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쓸어 올리자 토니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조금 더 손에 힘을 주고 살짝 솟아오른 지퍼 아래 부분을 쥐듯이 문지르자 토니가 발을 버둥거렸다.

  "어떻게 하면 돼?"

  거의 벗겨지다시피 한 셔츠 아래로 토니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아래를 쥐고 있는 아담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이미 목까지 빨개진 토니가 민망한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속삭였다. 

  "네 맘대로 해..."

  잔뜩 흐린 하늘 너머로 해가 떴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시계는 오후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결혼식은 오전 11시였다. 부재중 전화목록이 무수히 찍힌 토니의 휴대폰은 바지와 함께 던져져 침대와 욕실의 1/3 지점쯤에서 뒹굴고 있었다.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들과 마시고 던져버린 빈 물병과 엉망으로 구겨진 시트가 지난 밤 이 방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 엉망이야."

  토니는 반쯤 잠에 잠겨 반쯤은 절망에 잠겨 중얼거렸다.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아담이 토니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도... 최고의 크리스마스였어."

  “넌 정말...”

  “안다니까. 나쁜 새끼인 거.”

  그 말을 끝으로 아담은 토니의 목을 끌어안으며 시트를 끌어 올려 얼굴까지 덮어 버렸다. 이제 막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햇빛에 꿈틀대는 하얀 시트가 눈부시게 빛났다.

 un frac tout froissé

moo

© AdamxTony Collaboration by. nanna created with Wix.com

  • Twitter Clean
  • w-flickr

합작에 제출해주신 글, 그림은 각 개인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불펌 및 배포, 리터칭을 금지합니다.

© Copyright 저작권 보호 대상입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