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브는 아니지만
문
* Nutcracker suite, Op. 71a: Ⅱ. Danses caratéristiques. B. Danse de la fée dragée: Andante non troppo – Martha Argerich & Nicolas Econom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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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들이 가지와 작별을 고하는 계절이 되자 거리의 가게들은 앞 다투어 단장을 시작했다. 빨강과 초록은 언제나 고전 중 으뜸이었고 황금빛 전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올해의 유행은 파스텔 핑크였지만 군청에 가까운 선명한 파랑 또한 그에 못지않게 인기가 좋았다. 랭엄의 선택은 에린지움에서 그대로 뽑아낸 것 같은 푸른색의 벨벳 리본과 표면에 섬세한 패턴이 새겨진 은색 볼이었다. 흠 하나 없이 표면의 광택을 자랑하는, 민무늬의 볼도 있었다. 열댓 개의 샘플들 중 실내 인테리어와 식기 그리고 음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 토니가 직접 고른 것들이었다.
“어때?”
물론 그는 아담의 의견을 구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좋은데.”
아담의 ‘좋은데’라는 말에는 좋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의미도 담겨있지 않았으므로 그는 곧장 거래처에 필요한 만큼을 주문했다. 물론 작은 전구들도 함께. 홀의 조명 대부분이 꺼지고 나면 그 전구들은 아주 느리게 점멸을 반복하며 제법 다정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영수증 정산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아담의 기운을 북돋는 데는 충분히 제몫을 했다. 아담은 며칠 전부터 토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기분이 적당히 좋은 날에 별일 아니라는 말투로 물어볼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여 거절당하는 경우에도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넘어갈 수 있도록.
“토니.”
그러나 아담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바로 그 순간에, 토니가 계산이 맞지 않는 구석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그의 계획은 단박에 어그러지고 말았다.
“왜?”
토니는 모아 쥔 영수증에 눈을 박은 채 대답했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어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확실히 좋지 않은 신호였다. 아담은 곧장 후퇴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냥. 오늘 수고했다고.”
누가 말했던가, 제대로 된 수가 아니면 말을 놓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했다. 입을 다물기도 전에 아담은 상황이 더욱 나빠졌음을 직감했다. 토니가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았으니 그래도 좀 낫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제대로 삐끗한 것이 분명했다.
“아담.”
토니가 그의 이름에 무게를 담아 불렀다. 아마 한숨이 먼저 나오려는 것을 참느라 그랬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해줘.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제 어지간한 것에는 놀라지도 않잖아. 오히려 네가 먼저 말을 꺼내줘서 고맙게 생각해.”
그는 아담이 무언가 큰 사고라도 쳤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주 틀린 짐작은 아니었다. 아담은 그가 생각지도 못했을 방향으로 한 발 내딛을 작정이었기 때문에. ‘솔직하게.’ 아담은 빈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토니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이브에 뭐 해?”
문장은 너무도 짧아 팔랑거리며 잇새로 달아나버렸다.
“뭐?”
그 때문에 토니의 귀에조차 닿지 못한 걸까. 다시 묻자니 죽을 맛이었다. 아담은 들고 있던 앞치마와 수줍음과 창피함 사이의 어떤 감정을 한데 말아 쥔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브에 뭐 하냐고. 약속 있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토니는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목 언저리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킬킬댔다. 이마에 손을 얹고 손부채질을 하며 겨우 가라앉혔다가도 발작적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코끝을 훔치고 목을 큼큼 가다듬기를 몇 차례, 드디어 웃음이 멎은 토니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담.”
푹신한 등받이에 파묻히듯 기대 앉아 고개를 저었다.
“약속이 있어도, 없어도, 난 너랑 데이트 안 해.”
-
패스 앞에 선 아담의 머릿속은 여느 때보다 훨씬 복잡했다. 그 속을 정리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음식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을 더욱 부채질 해, 점심 서비스 시간 내내 모두를 살얼음판으로 내몰았다. 접시는 연달아 허공을 날아 쓰레기통에 처박혔고 아담의 고함소리와 조리기구들이 부딪치는 소리는 서로 대결하듯 목청을 높이고 핏대를 세웠다.
“차라리 밖에 발가벗고 서서 비나 옴팡 맞는 편이 낫겠어.”
전반전이 끝나고 잠깐 배를 채우며 숨을 돌리는 사이 맥스가 툴툴대며 말했다. 혹여나 그의 목소리가 아담의 귀에 들어갔을까 싶어, 모두들 곁눈질로 그의 심기를 살폈다. 여전히 뿔이 난 그는 이쪽에는 한 톨만치의 관심도 없는 듯싶었다.
“아서라. 그 꼬락서니를 볼 우리는 무슨 죄야.”
“대체 뭐 때문에 저러는 거야?”
“낸들 아나? 요 며칠 이상하게 들떠 보인다 했더니 이번엔 또 기분이 바닥을 칠 차롄가 보지.”
영문을 모르는 입들만 모여 수근 대던 차에 토니가 나타났다. 그는 오늘따라 유달리 기분이 좋아보였다. 가벼운 발끝으로 소리 없이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쌍쌍의 눈들이 자연스레 그에게 집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들 깨달음을 얻었다. 토니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는 아담의 표정은 힌트라기보다는 컨닝 페이퍼에 가까웠으므로.
“내기할까? 난 no.”
“나도.”
“나도 no."
반대편이 없었으므로 내기는 싱겁게 무산되었다. 혹시 더 끌어들일 이가 있나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모두들 접시에 코를 박고 밥을 먹었다. 부디 후반전은 덜 치열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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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의 날이 되었다. 예선에서 처참하게 탈락한 아담은 누군가의 차에 올라타는 토니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녁 서비스를 이렇게 내팽개쳐놓고 가도 되는 거야?’
단정히 머리를 빗어 넘긴 뒤통수에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벌써 그도 차도 사라져버렸다. 케이틀린을 비롯해 숙련된 프로들로 채워진 홀은 사실 토니가 없어도 잘 돌아갈 터였다. 제가 스트레스를 핑계로 손을 놔버린다 해도 헬렌이나 데이빗이 주방을 잘 이끌어줄 테고. 그러니 토니를 붙잡아놓을 이유는 이 랭엄 안에는 단 한 가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담은 무엇이든 트집을 잡고 싶었다. 예선만 통과했다면 우승컵을 쥐었으리라는 헛된 꿈을 꾸면서.
그의 헛꿈은 지난 며칠 새 무럭무럭 자라며 신경을 긁어놓았다. 수첩의 리스트는 여느 때보다 길어졌고 수면 시간은 그만큼 짧아졌다. 몽롱한 정신으로 아침 해를 맞이할 때면 그는 충혈 된 눈을 벅벅 비비며 제 자신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대체 왜?’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오늘 토니의 파트너도 그가 참석할 고상한 자선 행사도 아니고, 그날 폭발하듯 터트렸던 웃음의 의미였다. 그럴듯한 추측이 여럿 있었지만 그 웃음의 진정한 뜻은 토니만이 알 터였다. 아담은 앞치마 끈을 고쳐 매며 창가에서 돌아섰다. 그는 없어도 아담에게는 제몫의 경기가 남아있었다.
-
659호의 밤은 언제나 길었다. 눈 감았다 뜨면 사라져버리는 그런 성질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담은 그 긴 시간을 토막토막 잘라 썼다. 거리의 음식들을 혀로 낱낱이 파헤치기도 하고, 한 시간이 될까 말까한 쪽잠을 자기도 하고, 도돌이표를 따르는 양 같은 단어들을 수첩에 적기도 했다. 할 일은 언제나 밤보다 적었다. 항상 그것이 문제였다. ‘세 시도 안됐다니. 최악이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도로 몸을 뉘였다. 베개에 머리를 더 깊이 묻으며, 커튼 사이로 들어온 불빛이 천장에 만들어낸 선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이정표라도 되는 것처럼.
때로는 그런 작은 표지판들을 무시 말고 따르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
“토니.”
“저녁엔 별일 없었어?”
당신이 정말로 갈망하던 것이 그 너머에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응.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
“좀 걷다 보니까. 너야말로 여긴 어쩐 일인데.”
“나야 뭐 여기 사는 사람이잖아.”
작은 전구들은 노상 그러듯 끄고 켜지기를 반복하며 둘의 겸연쩍은 얼굴을 비추었다. 랭엄을 나설 때보다 머리가 조금 헝클어진 토니의 귓바퀴에 붉은 기가 돌았다. 걸었다더니 추위 때문인가 싶어, 아담은 토니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토니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외려 똑바로 마주보았다. 아담은 그 바람에 내심 당황했다.
“아침 해줄까?”
또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질 정도로.
“이 시간에? 대체 그 아침이 뭔데.”
토니는 그날처럼 발작 같은 웃음을 터트릴 기세였다. 아담이 싫으면 됐다고 황급히 덧붙였지만 이미 입꼬리를 쭉 당기고 눈은 반쯤 찡그린 상태였다.
“너 좀 형편없는 거 알아? 그동안 여자들은 다 어떻게 꼬신 거야?”
종전의 부끄러움을 넘어, 난데없는 소리에 아담은 이제 좀 억울함까지 느낄 차였다.
“형편없단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그럼 넌 내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데이트를 거절한 거야?”
“오, 아담 진정해.”
그의 말소리가 높아지자 토니는 와 앉으라는 듯 제 옆의 의자를 툭툭 쳤다.
“널 놀려주려고 장난 좀 친 거야. 어차피 그 행사는 아버지 대신이라 무조건 가야 하는 거였고. 장난이 조금 길어진 건 미안. 그리고 실은 우리한테는 여느 연인들 같은 시작이 어울릴 것 같지가 않았어. 이렇게 새벽에 불쑥 마주치는 게 훨씬 우리답지 않아?”
“…….”
“중요한 건 너랑 내가 여기 같이 있다는 사실이잖아. 이브는 아니지만.”
아담은 고요히 토니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진심을 읽어내는 것은 함께한 세월만큼이나 쉬웠다가 또 어떤 때는 꼭 그만큼 어렵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제 짐작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럼 오늘은 뭐 할 거야? 약속 있어?”
“응.”
“…….”
“이거.”
토니는 단박에 아담의 두 볼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달고 간질거리는 살들이 냉큼 입안으로 들어와 부비고 섞였다. 아담은 난생 처음 접하는 맛들을 이모저모 핥고 쓰다듬고 종래에는 전부 제 것으로 만들었다. 덩달아 다급해진 손이 토니의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뒷목을 쓸다가 차츰 제 쪽으로 당겼다. 토니는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에 가 앉았다. 외투는 쉽게 바닥으로 떨어졌고 셔츠보다는 바지 버클이 풀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바쁜 손들은 서로에게 파고들어 이미 단단해진 것들을 능숙히 쥐고 흔들었다. 찬 실내에 뿜어진 입김은 저들의 사정대로 몸을 섞었고, 달뜬 목소리는 귓가를 간질이며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고개를 젖히고 쾌락에 몸을 적시던 토니는 허리를 가벼이 움직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담.”
“응?”
“끝나고 아침 먹을까?”
“그럴 짬은 없을 것 같은데.”
아담은 대답과 동시에 토니를 들어 테이블 위에 눕혔다. 랭엄의 밤은 짧을 것이 분명했고 그것은 둘을 채근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