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의 회상
테이톤
닥터 로스힐드는 바뀐 스케줄을 보고 조금 놀랐다. 귀국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사람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시간을 늦추라고 조언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토니 발레디는 그의 가장 비싼 고객인 동시에 그가 가장 책임감을 느끼는 고객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2주 만에 마주한 토니가 생긋 웃었다. 차를 두 잔 준비하며, 로스힐드는 남반구의 태양이 그의 피부색에 미친 영향을 생각했다.
“휴가는 잘 보냈나요?”
“네. 뭐…색다른 경험이었죠.”
토니의 시선이 진료실 탁자 구석에 자리한 조그마한 트리에 닿았다. 꼭대기에 달린 플라스틱 노란별과 색색의 장식이 특정한 리듬으로 반짝인다.
“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어요?”
“이런, 분명 치워달라고 했었는데. 미안해요. 지금 치울까요?”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그린 토니는 손을 들어 트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아녜요, 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귀엽네요.”
토니 몫의 찻잔을 내민 로스힐드가 자리에 앉았다. 트리를 만지던 손을 멈춘 토니가 찻잔을 받아 쥔다.
“나쁘지 않았어요. 뜨거운 크리스마스도 괜찮았거든요. 여름옷을 입고 해변을 거니는 크리스마스라니, 제법 여운이 있잖아요?”
“산책을 많이 했나 봐요.”
“네. 일광욕까진 아니어도 햇볕을 좀 느끼고 싶어서요.”
“그래요.”
“정작….”
말끝이 흐려진다. 한 손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토니는 언제나 정장을 고집했다― 발레디 패밀리의 막내아들은 느릿한 동작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잊고 싶은 게 잊히진 않더라고요.”
“크리스마스 얘기인가요?”
입을 다문 토니가 잠깐 눈을 굴렸다.
“아담 존스 얘기예요.”
말없이 사라진 뒤로 몇 년째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남자였다. 로스힐드는 그를 직접 언급하기를 피했다. 토니는 힘겨워하면서도 그 이름만큼은 자기가 먼저 부르고 싶어 했다.
장 뤽의 레스토랑은 평소에도 눈 튀어나오게 바빴지만 특별한 날에는 헛구역질이 올라올 만큼 바빴다. 겨우살이, 전나무, 손톱만한 것부터 성인 머리통만한 장식, 장식, 장식들. 밀리미터만 한 오차도 귀신같이 찾아내는 지배인 덕분에 토니는 저녁부터 발바닥이 닳도록 레스토랑을 돌아다녔다. 몇 번이고 박살난 쪽은 주방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근처를 스치기만 해도 날선 분위기에 절로 목이 졸렸다. 아담은 입을 꾹 다물고 주방에 틀어박혔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한 마디 음담패설도 욕설도 없이 침묵하는 아담 존스가 더 위험한 법이다.
이브와 크리스마스 내내 레스토랑은 꽉 찼다. 까치발로 서서 빨갛고 하얀 줄무늬 양말을 반짝이는 트리에 걸던 유년 시절의 설렘을 회상할 틈도 없이, 탈의실 의자에 앉은 토니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뻣뻣한 손으로 주물렀다.
똑똑―
“꼬맹이 토니.”
하루 일과를 마친 눅진한 공기를 단숨에 휘저어 놓은 노크와 부름은 동시에 들려왔다. 놀라는 대신 한숨을 푹 쉰 토니가 고개만 휙 돌려 목소리의 주인과 눈을 맞추었다.
“뭐야.”
목소리는 푹 퍼져 있었다. 까끌까끌한 대응을 돌려줄 힘도 모자랐다. 미간을 찡그린 아담이 터벅터벅 걸어와 다짜고짜 옆에 주저앉았다. 실핏줄이 불거져 시뻘건 눈, 거뭇한 눈 밑. 토니가 속으로 혀를 찼다. 저거 또 목숨 갈아 넣었네. 평소에는 얄팍하다고 불러도 좋을 인간 아담 존스는 요리만큼은 다른 자세로 임했다. 너 그러다 일찍 죽어. 충동적으로 뱉은 말에 연필을 귀에 꽂은 아담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오래 살 생각이었어? 토니는 충동에 굴복한 것을 후회했다.
“먹어봐.”
“뭐?”
아담 손에는 접시가 들려 있었다. 눈을 비비자 순간 시야가 흐려져서 토니는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크림을 다시 만들었거든.”
“부쉬 드 노엘 때문에 이 시간까지 집에 안 갔어?”
아담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저 자식에게 굳이 확인해 봤자 쓸모도 없음을, 토니는 뒤늦게 깨달았다. 원래 그런 놈이다.
“맛 평가는 주방에서 하면 되잖아.”
“다 했어.”
“나한테 먹이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확실하잖아.”
이것저것 생략하고 툭툭 뱉는 말에 숫제 짜증이 섞였다. 내가 이러는 데 다른 이유가 필요하냐는 투다. 아담은 제 능력을 증명하기를 좋아한다. 괴짜라는 표현도 부족한 천재 셰프가 인정을 갈구하는 사람 중 한 명이 토니 발레디라는 사실은 언제나 토니의 숨통을 조였다. 나쁜 의미로든, 좋은 의미로든. 더는 토 달지 않고 포크를 집는 토니를 본 아담의 입가에 만족과 초조함이 섞인 웃음이 번졌다.
단단하던 크림이 입속에 부드럽게 퍼진다. 달콤한 초코 크림을 혀로 녹여 음미하다가 적당히 촉촉하고 부드러운 케이크를 이로 부수었다. 피곤에 절어 있는 몸도 달게 받아먹을 기분 좋은 단맛. 한참 우물거리던 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맛있네.”
“그래?”
“응.”
아담 존스가 안도한다. 한 마디로 그를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담담하게 넘긴 토니가 접시를 아담에게 돌려주었다.
“다 좋은데 가서 씻고 자. 그것도 중요해.”
“시끄러워.”
당연한 반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토니가 크로스백 지퍼를 닫았다. 자정이 지났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이걸로 끝이다. 레스토랑에 가득한 크리스마스 상징은 당분간 그대로겠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응?”
“일하느라 기분은 못 냈지만.”
접시를 주섬주섬 챙긴 아담이 먼저 일어났다. 빠르게 주방 쪽으로 움직이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토니는 퇴근도 잊고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접시를 들고 사라지는 아담 존스의 표정은 어땠는지 가물가물했다. 토니가 회상할 수 있는 건 나직한 목소리가 건네 온 늦은 인사,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붙들고 로커에 이마를 댄 채 진정하려 애쓰는 제 모습이 전부다. 기억은 짧아도 또렷하게 남아 차가운 공기와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해마다 찾아왔다.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서 결국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먹었지 뭐예요.”
“크리스마스니까요. 맛은 있었어요?”
차를 새로 부어 주며 로스힐드는 여상하게 물었다. 토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날따라 단 게 힘들더라고요. 반도 넘게 남겼다가, 결국 버렸어요.”
“저런.”
“날씨 문제였나 봐요. 따뜻하다 못해 더워서…. 아이스크림이나 실컷 먹었죠. 덕분에 지금도 속이 좀 차가운 것 같아요.”
토니가 피식 웃었다. 로스힐드는 미소로 화답했다. 트리의 불빛 패턴이 세 번 반복될 때까지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잊어버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것 같아요.”
“결정하는 데 여행이 도움이 됐나요?”
“네.”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기억도 있으니까요. 토니는 더듬더듬 말했다.
그날 저녁, 로스힐드는 건물의 청소 담당자에게 작은 트리를 버려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토니 발레디의 이름으로 로스힐드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도착했다. 동봉된 카드에는 얼굴을 마주보고 전했다가는 거절할 것 같아 이렇게 우편으로 보낸다는 메시지가 고상한 필기체로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