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의 제안
율랴
장식 벽면 사이로 말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접시와 잔을 앞에 둔 채 누구는 그간 바빠서 만나지 못한 친구들과 함께 그간의 소식들을 주고받았고, 누구는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든 이들이 입 밖으로 내는 소리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긴장감과 묘한 즐거움들이 호텔의 로비에 세워진 두 크리스마스트리까지 다다랐다. 흰 바탕에 검은 무늬를 띤 대리석 기둥의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계절감을 잔뜩 뿜어내고 있는 이 두 트리에는, 붉은 리본 장식과 황금색 구체들이 매달려 있었다. 12월 25일까지는 아직 사흘이나 남았지만, 호텔은 이미 크리스마스나 다름없었다.
레스토랑은 한 달 전부터 크리스마스 메뉴를 내걸고 있었다. 미슐랭 3성을 따게 된 이후, 예약 명단은 날로 길어져만 갔고 그만큼 불평불만도 많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토니는 계절 메뉴를 일주일 앞당기자고 아담을 설득했고, 자신의 요리에 대한 갈망을 더욱 느끼고 싶다는 아담의 불건전한 기쁨은 이에 끝이 났다.
“테린 하나, 수프 하나, 대구 둘!”
새로 들어온 주문을 아담이 크게 외치자, 주위에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요리의 가니시를 매만진 다음 서비스를 하고 고개를 들어 주방을 둘러보았다. 주방은 이미 열기로 가득 차 뒤뜰로 나 있는 창문에는 김이 뿌옇게 서려 있었다. 직원들의 얼굴은 이미 발갛게 상기된 지 오래였다. 일곱 명의 사무라이처럼 모두가 완벽하고 절도 있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담은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완벽이라는 그 허상에 자신을 가두고 자학하던 시절은 끝났다. 그 사실은 다른 이들보다 비교적 주방에 늦게 들어온 레니와 니키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란성 쌍둥이인 두 남매는 각각 굽기와 전채 담당이 되었는데, 레니는 과하게 열정적이었고 니키는 너무나도 그와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게임 테린을 준비하고 있는 니키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어, 마치 정말로 그녀가 런던 근교에서 사냥해 온 가금류로 요리를 만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예전의 아담이라면 니키는 그의 주방에 없었을 것이다. 자기를 물어치울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장 뤽이 그를 주방 안으로 들여보내 준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까? 질문이 하나 떠올랐지만, 감상에 사로잡히긴 싫어 그는 고개를 돌렸다. 대구를 굽는 데 열중한 레니가 머리에 두른 밴대나를 발견하자, 그는 작게 미소 지었다. 땀을 많이 흘리던 레니를 보다 못한 맥스의 조언 이후, 밴대나는 레니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어 본 적은 없지만, 아담은 그 푸른색 천쪼가리가 주방 모두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존스 씨.”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뒤통수를 향해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리며 감상에 젖어있던 게 아니라고 무언의 항변을 했다. 그를 부른 건 케이틀린이었다.
“손님 중에 당신을 찾는 사람이 있어요.”
“칭찬이라면 넣어두라고 해. 더는 보탤 찬사는 없으니까. 망할 크리스마스 푸딩은 대체 어디 간 거야?”
아담은 그녀에게 손을 내젓고는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주방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필립 반즈가 왔다고요.”
“그 사람이 누군데?”
그의 대답에 상대방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이에 굴할 아담이 아니었다.
“대체 누구기에?”
“지난달부터 사보이 총책임자가 된 사람 말이에요, 십 년 넘게 그 자릴 해 먹은 키어런 맥도널드 후임으로 들어온!”
“미안하지만 케이트, 내 할 일은 요리지 이 업계 정치가 아니야. 여왕의 증손자들 이름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빌어먹을 사보이 호텔 책임자 이름을 알겠어?”
“아무래도 오늘 토니가 비번이라 온 것 같아요. 나도 이제 눈감아주기 지쳤으니까, 어서 가서 만나보라구요.”
그 말과 동시에 케이틀린이 그의 소매를 잡더니 주방 문 쪽으로 끌어당겼다. 쓸데없는 일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할 그녀가 아니었기에, 아담은 조금 당황해하면서 그녀를 따라 주방 밖으로 나갔다.
실내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모두 대화에 열중하며 앞으로 도착할 요리를 기대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앞에 놓인 요리의 감각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부른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아담은 고개를 두리번거릴 뿐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저기, 자주색 넥타이에 붉은색 행커치프를 한 남자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담은 그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가 실내를 가로지르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는 태연하게 케이틀린이 지목한 사람에게 다가가, 잘 써먹지 않아 분명히 어색할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담 존스입니다. 실례지만 혹시 요리가 입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훌륭하더군요. 특히 이 쪄낸 송아지 볼살 요리 말입니다.”
둘의 첫 대화가 호의적으로 흘러가자, 긴장하던 사람들은 안심한 모양인지 다시 저들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다음에 벌어질 상황을 아담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이유를 묻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존스 씨. 저희 호텔의 레스토랑 총주방장으로 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미 그쪽에는 훌륭한 주방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업계에 대해 잘 모르는 아담이지만, 적어도 사보이 호텔의 총주방장이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대답에 상대방은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런던은 더 이상 그 옛날의 런던이 아니지요. 변화에 맞춰, 케케묵은 관습을 버려야 하는 건 저희 호텔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스 씨가 원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오, 물론 연봉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어도 이곳보다는 더 많이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이 말에 아담은 조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조롱을 듣고 있던 그였으니까. 그래서 그는 조금은 빈정거림을 담아 상대방에게 답했다.
“그 낡은 관습을 아직 지키고 있는 게 바로 저인 걸 잊으셨나 봅니다. 메뉴를 보셨다면 알겠지만, 여전히 좀먹은 프랑스 요리들을 선보이고 있지요.”
그의 말에 상대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손바닥으로 요리를 가리켰다.
“그렇지만 이 요리는 전통이라고 해서 무조건 지키기만 한 작품이 아닌걸요. 당신은 충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갈 수 있는 요리사입니다.”
상대방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담에게 건넸다.
“제 명함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이쪽으로 연락해주시면 됩니다만, 시간이 그리 많진 않으니 빨리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담은 짧게 묵례한 후, 건네받은 명함을 받아든 채로 주방으로 돌아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확인을 받기 위해 패스 위에 가지런히 놓인 접시들과 케이틀린이었다. 재빠르게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고 요리가 나가자, 케이틀린이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뭐라고 했어요?”
“자기네 호텔 쪽으로 옮기라는 제안이었어. 다른 곳에서 연락 온 건 몇 번 있었지만, 레스토랑으로 찾아온 건 처음이군.”
“역시.”
그의 대답에 상대방은 드디어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에 아담은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아까 눈감아주기 지쳤다는 말은 뭐였어?”
“레스토랑 재개장 비용은 이미 지난 분기 수익까지 합해서 전부 충당했다는 건 알고 있죠?”
케이틀린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요즘 이직 제의도 많이 들어오고요.”
“그렇긴 하지. 뭐 나쁠 건 없잖아, 그 명성 덕분에 손님도 많이 오는 거고.”
“사실 저 사람, 저번부터 계속 존스 씨한테 연락하려고 했었어요.”
“뭐?”
“몇 달 전부터 예약 들어올 때마다 빈자리가 없다고 토니가 단칼에 거절하라고 했거든요. 오늘은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예약한 데다가, 토니가 비번이라 온 것 같았어요. 아마 저 사람도 충분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겠죠. 토니의 행동도 이해가 가긴 해요. 누군들 별 세 개짜리 요리사를 빼앗기고 싶어 하겠어요?”
“그렇다면 대체 왜 나한테 얘길 해주는 거야?”
“기회가 너무 아깝잖아요, 그 사보이 호텔인데! 솔직히 이번 일은 그래도 토니가 선택을 잘못한 거예요. 나중에 저 사람들이 존스 씨 번호를 알아내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고, 결국 이직하는 건 온전히 존스 씨 결정이잖아요. 뭐 빚도 다 갚았고. 나중에 토니한테 이 얘기해도 상관없어요.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한 거니까.”
아담은 케이틀린의 말을 듣고 나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성공 이후, 그는 명성에 따라 오는 온갖 것들에 시달렸다. 예외 없이 인터뷰 요청들을 모두 거절하자, 그는 더 매력적인 무언가가 되어있었다. 그때부터 아마 투자자들이 연락하기 시작했던 거 같다. 우연히 그가 주방 뒷문 앞에서 그런 전화를 받는 걸 토니가 봤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담은 그가 이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돈으로도 계약으로도 더는 묶이지 않은 자신을 토니가 필사적으로 잡으려 한다는 달콤한 사실은 마치 미약처럼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석연치 않았다. 이 모든 이야기에는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있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전에 아담을 부르는 데이빗의 목소리가 들렸고, 아담의 의심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모니터 앞에 앉아 회계사가 정리한 장부를 확인하고 토니는 앉은 자리에서 기지개를 켰다. 대략 계산했던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고, 이제는 순수입만이 남았다. 심지어 아담이 머물렀던 객실 비용도 충당한 금액이었다. 결국, 그는 상대의 말 대로 직원 할인을 해 준 셈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표정은 그다지 기뻐 보이진 않았다.
아담이 이직 제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진작 알고 있었다. 심지어 호텔에 딸린 레스토랑이 아니라, 아담 존스의 이름을 건 새 레스토랑을 지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투자자들도 있었다. 토니는 장 뤽의 레스토랑에 있었을 때, 아담의 말버릇을 기억해냈다. ‘내 이름으로 된 레스토랑을 세우면’, 그의 모든 꿈과 희망을 표현하는 문장들은 전부 그 말로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비겁하게도 자신의 손이 닿는 한 아담에게 이직 제안을 하는 이들을 물리치려 애썼다. 순전히 경쟁사에 유능한 인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함이라고 자위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단지 호텔 때문이 아니라는 걸 또다시 수긍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인정했다. 손안에 든 나비를 박제해 그 영원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것보다, 뜰로 정원으로 그리고 세상으로 보내주는 것이 결국 나비를 위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쯤이면 아마 이야기가 다 되었을 것이고, 아담은 고민할 것이다. 사보이로 가느냐, 아니면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만드느냐. 어떤 결과가 나온다 해도 그는 아담을 축하할 것이다.
문득 토니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그는 앉은 자리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뒤적였다. 화면에 뜬 건 그와 에바의 얼굴이었다. 그 푸른 눈동자를 보자 몇 달 전 공원의 비둘기를 눈으로 좇던 아이의 표정이 그의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물줄기를 억지로 바꾸기보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그에게도, 에바에게도 그리고 모두에게 좋았다.
토니를 깨운 건 평소 시간에 맞춰 울리던 알람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침대 옆 좁은 탁자를 향해 손을 더듬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는 다행히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집을 수 있었다. 그는 시린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쳐다보았다. 케이틀린이었다. 전화를 끊고 조금 더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른 아침부터 그녀가 자신에게 전화할 일은 급한 일임이 분명했기에 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훑어 전화를 받았다.
“케이틀린, 무슨-”
“토니, 지금 사진 보낸 거 읽어봤어요?”
“사진? 잠깐만.”
그는 귓가에 가져다 댄 휴대폰을 들고 비밀번호를 눌러 그녀가 보낸 문자를 열었다. 그는 한눈에 그 사진이 어떤 신문 지면을 찍은 거란 걸 알았다. 그리고 내용을 읽는 순간, 그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오 안 돼…….”
다른 기사에 비해 짧은 글이긴 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토니에겐 전혀 가볍지 않았다. 모 호텔의 지배인이자 실질적 소유주인 발레르디 씨의 입양된 조카는 사실 그와 유명 요리사이자 몇 개월 전에 미슐랭 3성을 따게 된 아담 존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자라는 게 그 기사의 주요 내용이었다. 1면에 큼지막하게 실린 것도, 공인의 외설적인 스캔들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이긴 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의 관점이었지, 절대로 토니 발레르디의 입장은 아니었다. 오늘 아침에 뜬 기사면, 점심 먹을 즈음엔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될 테고 저녁 먹을 때가 되면 그의 레스토랑에 올 손님들의 귀에까지 들어갈 게 뻔했다.
“토니, 토니? 듣고 있어요?”
“이게 도대체 어디에 올라온 거야?”
“더 썬, 래리가 알려줬어요. 자기 딴에는 우스운 농담이라고 생각해서 나한테 알려준 것 같더라고요. 아담한테도 연락했는데, 아예 전화를 받질 않아요.”
아담, 그의 생각이 아담에게로 미쳤다. 자신이 알고 있기로 아담은 어떤 신문도 읽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이 일을 아직 모를 수 있었다. 갑자기 그는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이 들었다. 아담은 지금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귀에만 들어가지 않는다면-
“케이틀린, 오늘 나 병가 좀 낼게. 만약에 아담이 왔는데 딱히 반응이 없어 보인다 싶으면, 혹시라도 이걸 아는 레스토랑 식구들이 말 걸지 못하게 좀 해줘. 부탁 좀 할게. 대신 유급휴가를 늘려 줄 테니까.”
그의 말에 수화구 저편에서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알겠어요,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볼게요.”
“고마워.”
통화는 끊겼지만, 토니는 한참이나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이 모든 게 꿈이기를 그는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렇지만 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자신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에서는 존스 씨가 제일 먼저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신문을 아예 손에 쥐고 들어오던걸요. 미안해요, 토니.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토니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게 그녀 때문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날 온종일 토니는 모든 1층 창문의 커튼을 친 집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딱 보기에도 이곳 거주자가 아닌 데다 기자 냄새를 풀풀 풍기는 사람들이 그의 집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인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자, 그녀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토니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모마저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예상치 못한 휴가에 - 온종일 집 안에 있는 것도 휴가라고 한다면 말이다 - 에바도 놀란 것 같았다.
“아빠, 할머니는 언제 와?”
“오늘은 제인 할머니가 못 온대. 대신에 아빠랑 있자.”
“왜?”
“할머니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거든.”
“그런데 친구들 여기 있는걸!”
에바는 그에게 인형을 들이밀었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공룡 인형이었다.
“할머니한텐 이 친구 말고 다른 친구들이 있대. 그러니까 오늘은 아빠랑 같이 놀자. 뭐 하고 싶니?”
“그럼 이거!”
그 말과 동시에 에바는 조금 멀리 떨어진 구석에 있는 노란색 통을 가리켰다. 토니는 그 안에 색색의 블록들이 가득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번엔 소꿉놀이했으니까 오늘은 집을 만들 거야.”
그는 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하지 않아서 그런지, 에바는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 잠이 들었다. 아이가 잠들자, 토니는 옆에서 읽어주던 동화책을 조심스럽게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종일 아이와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물론 주말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에바와 시간을 보내려고 했었다. 그는 에바를 사랑했지만, 일과 육아를 병행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역시 보모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모든 게 밝혀졌으니 더는 제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나마 이번 일에서 제일 나은 점이었다.
시간은 벌써 일곱 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토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은 그렇게 늦진 않았지만, 겨울이라 해가 빨리 떨어져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그제야 그는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작년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냈었지? 에바가 한 살이었던 그 해는 너무나도 정신없이 흘러갔었다. 재작년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였다. 에바가 태어났던 해였으니까. 그는 몇 년 만에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맞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다음 그의 손에 들린 건, 작년에 좋은 날에 먹을 요량으로 가져왔던 바롤로 와인이었다. 와인병을 한 손에 든 채, 그는 부엌으로 다가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구석에서 먹다 남은 고다 치즈를 발견하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와인을 유리잔에 따르고 한 모금 마시자 그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모든 불안감과 걱정거리들을 저편으로 던져버릴 수 있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토니는 눈을 떴다. 간간이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텔리를 켠 채로 와인을 마시다 소파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반사적으로 그는 손목을 쳐다보았다. 열두 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비적비적 일어나 창문 커튼 사이로 밖을 살폈다. 바깥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가로등 불빛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기온만 봐서는 그다지 춥지 않을지라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바람 때문에 런던의 겨울은 유독 추웠다. 토니는 지금까지 자신의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릴 정도로 끈질긴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자신을 향해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그는 움찔했다. 그리고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얼굴을 보고 그는 그 사람이 아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토니는 재빨리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계절에 걸맞지 않은 가죽 재킷에, 유일하게 겨울임을 나타내 주는 건 그의 목에 둘둘 말려있는 스카프였다. 그는 재빨리 아담을 집 안으로 들이고 현관문을 닫았다.
“여긴 왜 온 거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밖에 아무도 없던데 뭐.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상대는 다짜고짜 집 안으로 들어가 두 손에 든 짐들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토니가 빈정대지 않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 잘도 저녁이 입으로 들어가겠다!”
“쉿, 에바 자고 있잖아. 그래서 벨도 누르질 못했다고.”
아담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그 모습에 조금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토니는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뭐가 웃기는데?”
“지금 네가 날 챙길 상황이 아니니까 그렇지.”
토니의 말에 아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나야 워낙 전적이 많아서 말이야.”
그러더니 아담은 집주인의 허락이라도 받은 양 짐을 차례로 풀었다. 보아하니 주방에서 가져온 오늘 나간 메뉴인 것 같다고 토니는 짐작했다. 순간 그의 마음이 철렁하고 떨어졌다.
“오늘 이브인데 레스토랑은 어떻게 되었어? 이브 메뉴는?”
“나쁘지 않았어. 특히 스코틀랜드 산 훈제 연어와 캐비어랑 덴엄의 사슴 등심이 최고였지. 기사 때문인진 몰라도 예약이 평소보다 더 몰리는 거 같더라고.”
“다행이다.”
그의 말에 아담은 씨익 웃는 거로 대답을 대신 했다.
“아무튼, 너 분명히 걱정하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을 거 같아서.”
가져온 음식들을 식탁으로 옮기던 아담이 소파 앞 탁자에 놓인 와인과 와인잔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와인의 라벨을 확인하더니 병 입구에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뭐야, 괜찮은 와인 마시고 있었네. 아쉽게도 나는 마실 수가 없어서 말이야.”
“레스토랑 투자비용 다 회수했어. 이젠 마셔도 돼.”
“농담하지 마.”
그렇지만 토니의 표정을 본 아담은 바로 반문했다.
“정말?”
마치 숨겨둔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발견한 아이라도 되는 듯한 그의 반응에, 토니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 더 풀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때까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그 말을 뱉어냈다.
“상관없잖아. 이제 마시고 싶은 술도 실컷 마시고, 새 레스토랑도 차릴 수 있으니까.”
“그 건은 없는 일이 되었어, 이제.”
“뭐?”
토니의 반응에도 아담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계속 음식을 접시에 담았다. 그렇지만 그 뒷모습으로도 토니는 상대의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저녁에 시간이 나서 그쪽이랑 연락을 해봤는데, 발을 빼겠다고 하더라고. 아마 기사 때문인 거 같았어. 듣기로는 이직 제안한 호텔 쪽도 기존 주방장이랑 재계약한다는 거 같았고.”
“미안해.”
토니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아담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전혀 슬퍼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토니의 말을 듣고 놀란 것 같았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미슐랭 딴 게 다 누구 덕인데?”
“그렇긴 하지만, 너 이름으로 된 레스토랑 내는 게 꿈이었잖아.”
“여기에도 내 이름자 박혀있는데 무슨 소리야.”
그는 요리들 사이에 끼워두었던 레스토랑의 냅킨을 한 손으로 들며 말했다. 그는 농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계속 너 밑에서 일해야겠네.”
“저녁 먹고 갈 거지?”
토니는 불쑥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술이 덜 깬 것 같았다.
“이거 아무리 봐도 2인분이잖아.”
“마지막 서비스 끝나자마자 온 거긴 하지만, 먹고 가도 돼?”
아담의 물음에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아담의 어깨에서 조금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언제 눈여겨봤는지 재빨리 새 와인잔 하나를 꺼내와 따르는 상대를 보며, 토니는 최대한 입가에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좋았어, 네가 마셔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유리잔을 든 손을 앞으로 들어 올리더니, 아담이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토니.”
“메리 크리스마스, 아담.”
의식이 들자마자, 아담 존스는 눈을 뜨는 대신에 머릿속으로 그날 밤 일을 생각했다. 그는 시몬에게 연락해 짤막하게 아는 것들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신문사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언가를 빠르게 퍼뜨리려면, 그 방법이 제일 좋았다.
그는 토니가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시 그에게로 날아온 새는, 이제 언제든지 새장을 떠날 수 있는 몸이 되었으니까. 조금은, 아담 자신도 이 사실을 즐겼다.
그렇지만 그는 곧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케이틀린은 절대로 토니 발레르디보다 아담 존스를 위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행동은 토니를 위한 것이었고, 토니의 바람이었을 거였다. 자신을 떠나라는, 더 멋진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토니의 묵인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는 새장 문을 열고 나가는 대신에, 문을 걸어 잠그고 남아있기로 했다. 바보 같은 아담 존스. 너는 그를 사랑하지도 않잖아. 그가 원하는 건 절대로 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머리가 조금 울렸다. 그래 사실 이 모든 건 꿈인 거고 그는 지금 꿈에서 깬 걸 거다. 아마 그는 며칠 후면 투자자를 만나서 새 레스토랑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할 거다. 그는 눈을 떴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제집처럼 익숙해진 호텔 객실의 흰 침구도 아니고 높다란 천장도 아니었다. 토니 발레르디의 자는 얼굴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