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눈이다.”
브레이크 타임, 손님들을 맞이할 재정비를 하던 케이틀린은 커다란 창밖을 바라보며 하늘에서 살살이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비록 얇은 눈은 달뜬 열을 머금고 있는 아스팔트에 닿자마자 사라졌지만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는 충분했다. 따뜻한 캐롤이 은은하게 퍼지고 청명하게 울리는 식기 세팅 소리에 그녀는 따뜻한 머그컵이 간절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 달콤한 상상을 하며 랭엄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그녀 곁으로 반듯한 사내가 성큼 걸어왔다. 케이틀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예보 없었는데.”
“미슐랭 삼성을 거머쥔 랭엄에서 보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손님들은 좋겠어요.”
“그러게. 키친 쪽으로 갈테니까 여기 마무리 해줘.”
“네.”
크리스마스. 그 단어만으로도 설렘과 따뜻함이 묻어나오지만 앤서니 발레디에게는 발렌타인데이와 같은 또 하나의 이벤트로 전락된지 오래였다. 그가 무미건조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외식업으로 발을 들이고 나서 크리스마스에 발을 묶이는 경우가 종종 생겼고 결국 크리스마스는 그에게 있어 다른 의미로 중요한 날이 된 것 뿐이었다. 토니는 그걸 아주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고 다른 이들의 크리스마스를 축복해주는 건 그리 슬픈 일도 아니었다. 단지 가끔 그것이 조금, 아주 조금 아쉬울 때가 있었다.
“토니, 아담 봤어요?”
“주방 뒤뜰에 없어요?”
“없으니까 물어보는 거죠. 요새 이상하게 자주 사라져요. 다시 귀신 같이 나타나고.”
정말 이상해요. 발을 동동 구르듯 회색기가 도는 푸른 눈이 이리저리 굴러다녔고 그녀의 불안함이 토니에게 전이 되었다. 토니는 검지를 대고는 아담이 있을 법한 그리고 그에게 생길 법한 일들을 생각했다. 눈처럼 불어나는 경우의 수에 그는 프랑스어로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그 망할 셰프를 찾으러 가는 것이 낫다 싶어 몸을 돌리자 익숙한 흰 유니폼이 눈앞을 가득 매웠다. 빠른 속도로 무언가와 부딪혀 휘청거리는 그를 단단한 손이 잡아주었다. 손이 닿은 부분이 뜨거웠다.
“다들 왜 그렇게 심각해?”
“왜긴, 아담이 사라져서 그런거잖아요.”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또 이상한 사람들 만나고 그런 건 아니지?”
빗발치는 추궁들에 아담은 눈썹을 씰룩였으나 이내 허탈하게 웃으며 자신과 부딪혀 망가진 토니의 옷매무새가 단정하게 해주고 가슴을 다독여줬다. 안심해, 이젠 안 그런다고. 다독이는 손끝에서 피어오른 따스한 겨울 향에 토니는 코를 씰룩이자 아담은 무언가 들킨 사람처럼 서둘러 그에게서 멀어져 분주한 주방 사이로 숨었다. 그 꽁무니를 바라보는 토니와 스위니의 시선은 곱지 않았지만 곧 있으면 있을 크리스마스 디너를 위해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담이 키친에 들어가자 평화로웠던 주방은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토니는 어쩌면 이 모습에 그에게 매료된 걸지도 모른다. 투박한 손이 지나갔던 넥타이 주변을 어루만지며 토니는 다시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리스마스가 시작됐다.
*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
분주했던 홀에 어둠과 고요함이 내려앉았을 때, 랭엄은 그제야 늦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요리에 이골이 났을 것임에도 그들은 저들이 먹을 요리들을 만들고는 일전에 뽑은 시크릿 산타를 밝히며 가족과 같이 보내지 못한 크리스마스를 즐겼다. 그 사이에는 작은 릴리도 있었다. 제법 해박한 요리 지식을 뽐내는 릴리는 모두의 예쁨을 받기 일쑤였다. 오직 한 사람만이 시계를 연신 쳐다보며 조금 초조한 티를 냈다. 어딘가 다녀왔는지 무리에 끼지 못하고 멀찍이 뒤에 선 토니에 토니의 동그란 눈은 그를 따라 시계를 쳐다보았다. 긴 시계바늘이 자정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와 만나려는 걸까. 토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뒤에 선 아담에게로 다가갔다.
“아담, 안 즐기고 뭐해.”
“지금 빠지면 좀 그렇겠지?”
“당연하지. 셰프가 빠지면 되겠어?”
“나 먼저 토니하고 올라가볼게, 마저들 즐겨.”
대답을 무시한 채 토니의 어깨를 잡고 주방을 빠져나가는 아담의 등 뒤로 야유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여러 내용이 함축된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셰프가- 등 뒤로 들리는 말들에 토니는 궁금증에 계속 뒤를 돌아보며 발을 멈췄지만 저보다 힘이 센 아담을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내의 손길을 거부하기에는 감정이 살아있었다.
“뭔진 모르겠는데 시답지 않은 거면 각오해.”
“내가 시답지 않을 걸 준비하겠어?”
“그야 그러시겠지.”
659호 문 앞에 서자 토니는 긴장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659호 키를 꺼내려 하자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안대가 시야를 가려 놀란 다람쥐처럼 크게 움찔했다. 예민해진 귓가에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닌데 말이지.”
“왜, 왜 눈은 가려?”
“너 서프라이즈 이벤트 받아본 적 없어? 아직 어리구나, 리틀 토니.”
놀랄 준비 하시라고. 자신감에 찬 목소리가 복도와 귓가에 울렸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목소리. 아담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러했다. 사이 사이로 다른 감정들이 피어오를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는 당당했다. 귓가에 열이 올랐다. 이제 그때만큼 멋있지도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그때보다 더 설렌다. 딸깍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낮에 맡았던 따뜻한 크리스마스 향이 코를 자극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더듬거리는 손을 부드러이 잡고 아담은 토니를 의자에 앉히고 뒤에서 그의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도록 안대를 벗겼다. 뭉그러진 시야를 고치지 위해 토니는 눈을 계속해서 깜박였다. 눈앞에 있는 것은 선명하고 작고 따뜻한 크리스마스 만찬이었다. 진저브래드맨 쿠키와 콥 샐러드, 따뜻한 라자냐 그리고 기다란 샴페인 잔에 담긴 로제 샴페인까지.
“Merry Christmas, little Tony.”
“이거였어? 몰래 준비하던 게?”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사치잖아? 연인이랑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더더욱.”
식기 전에 먹어. 약간 부끄러운지 토니의 어깨를 다독이고 아담은 맞은편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부러 맛있게 잘 됐다면서 빨리 먹으라며 입을 놀리는 모습에 토니는 웃음을 터트렸다. 희대의 탕아 아담 존스가 자신을 위해서, 로맨틱한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 놀라웠고 그 아담 존스가 누구를 위해서 개인 시간을 쪼개가며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이 제일. 웃음으로 귀 뿐만 아니라 얼굴이 빨개지자 아담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빨리 먹어, 식어.”
“Merry Christmas, Adam. 서프라이즈 고마워.”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갈게.”
“응, 뭐라고?”
“빨리 먹으라고. 라자냐는 식으면 맛없어.”
침착했던 아담의 귀가 빨개졌다. 창 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이제는 소복히 쌓여 크리스마스의 정겨운 소리를 따뜻하게 덮어주었다. 랭엄에서 연인과 함께 즐기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러워했던 케이틀린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토니는 알 수 없는 행복감에 볼을 붉히며 웃었다.
Merry Christmas, little tony
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