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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줄

사빈

(*19세기 말 배경)

 

 

 

 

  발레디 남작 가는 비록 귀족으로선 낮은 계급에 위치하고 있지만, 옛날 동인도회사 시절부터 무역 사업을 시작하며 어디가서 콧대 좀 세우고 다닐 만한 부를 축적한 집안이었다. 현 발레디 남작은 아래로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할 맏아들과 아래 두 아들이 기사 작위를 받은 것과 다르게 막내 토니 발레디 만은 그저 평범한 청년이었다. 나이 차 나는 세 형과 한 명의 누나 아래에서 마냥 예쁨만 받으며 자라서 다른 귀족 아이들처럼 제멋대로 굴 법도 한데, 타고난 성정이 그래서 그런지 토니는 오히려 주위 눈치를 보는 소심한 아이였다. 공부도 제법 잘했지만 천재라고 할 만큼은 아니고, 피아노도 곧잘 쳤으나 그저 취미로 적당한 수준, 그렇다고 다른 한량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사업이나 정치에 대한 야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네.”

  토니는 허리를 직각으로 접으며 인사하는 지배인을 지나쳐 사무실로 올라갔다. 식기를 들고 가던 직원들이 그가 지나갈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고용주에 대한 격식을 차리는 거라지만 토니는 마음이 불편해 걸음을 재촉했다.

토니의 사무실은 층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넓고 으리으리했다. 손을 대지 않아도 자연히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서며 그는 한숨을 삼켰다. 딱히 찾아오는 손님이 많은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드넓은 공간은 딱히 토니의 자존감을 높여주지 않았다. 그는 뒤따라오는 지배인에게 코트를 벗어 건네고 고작 종이 몇 장 놔두자고 쓰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 성년이 되었는데 토니는 무언가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가문에선, 정확히는 발레디 남작이 그에게 런던에 위치한 식당을 하나 맡겼다. 그는 토니에게 이 식당을 런던, 아니 영국 최고의 요리를 자랑하는 가게로 만들라고 했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토니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마지못해 떠맡은 것치곤 실제로도 꽤 결과를 내고 있었다. 그의 인생이 여태 그래왔듯 훌륭하지만, 최고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담은 이제 좀 괜찮나요?”

  토니의 물음에 지배인이 못마땅하단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슬슬 머리가 희끗해지는 지배인은 어딘지 무기력해 보이는 토니 발레디가 처음 사장으로 왔을 때도 못마땅해 하다가 가게가 번성하는 것을 보고 지금은 누구보다 토니를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토니가 내린 결정 중 딱 한 가지만큼은 그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아담은 요리에 대한 센스가 훌륭합니다.”

  지배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다른 분야는 다 빵점이죠. 요즘은 잠잠하다 싶더니, 어제 주방 보조가 또 한 명 관뒀습니다.”

  "부족한 자리야 금방 채워지잖아요."

  토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사실 지배인이 걱정하는 부분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었다. 아담 존스를 이곳에 데려온 게 토니였으니까. 책상 위에 올라온 몇 장의 서류에 우아한 필체로 서명을 하여 지배인에게 건네준 그는 아담을 불러오라고 전했다.

잠시 커피를 마시며 창문 너머 금방이라도 눈이나 비를 뿌릴 듯한 회색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던 토니는 노크라기엔 약간 쿵쿵거리는 소리에 들어와 하고 짧게 대답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역시나 아담 존스였다. 벌써 일 년이 지났는데도 하얀 조리복 차림이 아직 낯설었다. 토니에겐 아직 검은 연미복의 아담이 더 익숙했다.

아담 존스는 원래 토니 발레디를 수행하던 풋맨이었다. 예의범절은 부족하지만 외모가 뛰어나 그것만 보고 고용했다. 처음엔 저택에 손님이 방문하면 문을 열어주고 안내를 하거나 갖가지 잡다한 일을 하다가 몇 달도 안지나 비어있는 발렛 자리를 대신해 토니를 곁에서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 성질머리가 워낙 괴팍하고 메이드들과는 또 얼마나 추문이 많던지, 토니가 기거하는 발레디 가의 런던 타운하우스를 관리하는 집사는 늘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였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쫓겨나게 된 일이 벌어졌다. 토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아담도 딱히 반성의 기미는 없었지만.

  “아담, 또 쫓겨나고 싶어?”

  두 번은 도와주지 않을 거야. 덧붙는 말에 아담은 혀를 찼다. 어쩜 나이를 먹어도 이리 변하지 않을까. 토니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왜 부른 겁니까?”

  “그야 고용주로서 말썽이 있는 직원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서지.” 

  토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건방지게 팔짱을 끼고 서있던 아담은 토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토니는 책상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으며 훨씬 더 가까워진 아담의 얼굴을 살폈다. 채도 낮은 아쿠아마린을 박아 넣은 듯한 파란 눈동자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토니를 훑어보고 있었다. 아마 감정과 욕망에 무지하고 어설펐던 예전이라면 낯설고 무섭다고 생각했겠지만, 벌써 시간은 나이에 숫자를 하나씩 더했고, 그만큼 토니는 이런 걸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하고 약아졌다.

  아담이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만큼 토니는 상체를 뒤로 물리며 피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삐죽이 웃는 얼굴이 얄미워 아담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점점 다가갔고 토니는 뒤로 피했다. 그렇게 다가가고 물러나길 반복하다가 끝에 닿았다. 아담은 양 손을 책상 위에 짚으며 거의 책상 위에 드러눕다시피한 토니를 제 팔 안에 가뒀다.

  “내가 미치는 게 보고 싶어요?”

  아담은 토니의 입술 위를 핥았다. 여태 뒤로 물러난 게 무색하게 토니는 순순히 입술을 벌리며 아담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담은 마음껏 토니의 입 안을 헤집고 혀를 얽었다. 입술이 맞물렸다 떨어질 때마다 조금씩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으음. 토니는 옅은 콧소리를 흘리며 아담의 어깨 위로 팔을 걸쳤다. 아담은 단정하게 빗은 토니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헤집었다.

  “당신을 안고 싶어요.”

  아직 스물다섯, 한창 욕망에 들끓는 청년을 밀어내며 토니는 안 돼, 하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토니가 달라진 만큼 아담도 이제 쉽게 속거나 밀리지 않았다.

  “젠장, 이렇게 유혹해놓고 또 도망가시려고?”

  아담이 아직 타운 하우스에서 일하던 시절에, 처음엔 토니가 조금 거부하긴 했어도, 두 사람은 진짜로 정사를 가질 뻔했다. 하필 집사에게 그 상황을 들키지 않았다면 아마 현재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토니는 수염이 까슬까슬한 아담의 턱을 손끝으로 더듬다 약간 마른 뺨을 쓰다듬었다. 아담은 고개를 틀어 토니의 손바닥에 입술을 맞췄다. 쪽쪽거리는 간지러운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떨어져 가슴을 자극했다. 토니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집안에서 결혼 상대를 정해준대.”

  아담은 멈칫했으나 덤덤한 얼굴을 봐선 딱히 동요하는 걸로 보이진 않았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삐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또 삼 일 만에 이혼 당하려고요?”

  토니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 그래. 삼 일 만에 당신과 같이 살 수 없다며 아내가 떠났고 다음 날 아담과 동침하려고 했지. 옆에서 보기엔 꽤 충격적인 일이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모든 게 마치 남의 일인마냥 희미했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담은 여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있으니까. 토니는 자신이 정말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곧 성탄절이에요.”

  일 년, 잘 버티면 선물 준다면서요. 아담은 어린아이 같은 말을 하며 토니의 옆머리나, 뺨이나, 귓가, 혹은 턱 같은 곳에 입술을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음. 토니는 낮은 탄성을 흘리며 아담의 짧게 다듬은 뒷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탄탄한 허벅지와 얽혀있는 다리 사이가 점점 뜨거워졌다. 토니는 허리를 들어 아담에게 몸을 마구 문대고 싶은 기분을 꾹 참았다. 성급할 필요는 없었다. 이럴 때 그는 자신에게 질척하게 구애하는 아담 존스란 남자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타운 하우스에 있을 때나 식당에서 일할 때나, 자의든 타의든, 아담은 여전히 많은 스캔들을 몰고 다녔다. 토니는 아담과 얽힌 여자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었다. 서른 살이 머지않은 남자가 참 음흉하고 치졸하기도 하지. 그는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비하하고 조롱하면서도 추한 질투를 멈추지 않았다. 이따금 비참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담이 한결같이 자신을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걸 느낄 때면 기분 좋은 소름이 오싹 돋았다. 과연 토니 발레디가 태어나 본 것 중에 가장 탐나는 것이었다, 아담 존스는. 아름답고 퇴폐적이다. 그래, 다들 한 번쯤 건들고 싶을 만했다. 아담 자신도 얄미울 만큼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토니는 절대 쉽게 현혹되지 않으려고 했지만, 혼인 문제가 겹쳤을 때엔 얼결에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모든 건 무산되었으나,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 년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담은 그 결정을 이해하지 못해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알고 있는 토니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확실한 것을 원했다. 아무리 허허롭고 무기력해 보여도 토니 역시 탐욕스러운 발레디의 사람이었고, 그는 아담이 온전히 자신에게 집착하길 바랐다. 양아치처럼 괜히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관심을 끌고 도발하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자신에게 골몰해야 해야 안심이 될 거 같았다.

  “개처럼 현관 앞만 지키다가 처음 당신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를 늘 생각해요. 당신의 나이트가운을 벗기고, 맨몸에 하얀 셔츠를 입혀주는 일은 꼭 몽정을 하는 기분이었어요.”

  이것도 고백이라면 고백일까. 지극히 아담다운 표현에 토니는 웃었다.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정도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점점 들었다.

  “난 네가 원한다면 새빨간 코르셋도 입을 수 있어.”

  선정적인 색상의 코르셋은 창부나 입는 것이었다. 토니가 나직하는 말에 아담은 농담이라고 생각한 건지 실소를 터트렸다. 토니는 굳이 진심이라고 되짚어주진 않았다. 몸에 딱 맞춘 정장과 보석 커프스링크, 수입산 가죽 장갑, 브로그로 화려함을 더한 구두 따위로 포장된 상자에서 오래 기다리고 길들인 욕망은, 미리 알려주지 않아도 어차피 아담이 앞으로 마주할 것이었다. 그때가 오면 아담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토니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어릴 적부터 성탄절이 되면 늘 갖고 싶은 선물이 주어졌다. 순진한 시절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에겐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이름을 과시하기 위한 것만 주어졌다. 토니는 파티에서 그를 돋보이게 해줄 다이아몬드나 루비 커프스링크, 장인이 뚜껑을 조각한 순은 담배 케이스, 혹은 실제로 타지도 않는 요트 따위가 필요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저급하고, 품위 없고, 비도덕적이었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당장 가문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그런 것.

  아담의 손이 옷 위로 그의 몸을 더듬었다. 허벅지 안으로 스치는 간지러운 감각에 토니는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성탄절 연휴엔 본가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토니는 배고픈 사냥개처럼 저에게 매달리는 아담을 강하게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집요하게 애무했던지, 귓가가 축축했다. 토니는 오싹오싹한 기분을 감추며 혀끝으로 아담의 이름을 굴렸다.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눈빛이 달라지는 아담을 보니 이제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완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이 척추를 타고 내달리며 온몸을 흔들었다. 사랑 따위가 아니어도, 아무리 손을 뻗어도 쉽게 먹을 수 없는 과실에 대한 오랜 집착이라고 해도 그걸로 족했다. 기쁨과 흥분에 가슴이 쿵쾅거리고 아랫배가 저릿했다. 토니는 아담의 뺨을 감싸고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그날은 아무도 없을 거야. 뭐든 해도 돼. 그건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신비롭게 들렸다.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음에도 아담은 특별히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토니의 허리를 끌어안는 팔엔 힘이 단단히 들어갔다. 토니는 아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때까지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다가오는 12월 25일, 그들은 아주아주 음탕한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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